주일예배말씀

  • 홈 >
  • 말씀 >
  • 주일예배말씀
주일예배말씀
만세에 복이 있다고 고백하는 여인 운영자 2019-12-22
  • 추천 0
  • 댓글 0
  • 조회 78

http://saegil.onmam.com/bbs/bbsView/18/5666560

눅1장39절48절

만세에 복이 있다고 고백하는 여인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골로 가서 유대 한 동네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46.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예수님의 생애를 우리에게 전해주는 책이 복음서인데 4복음서 중에서 제일 먼서 기록된 책이 마가복음서입니다. 마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 생애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만 그대로 기록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서로 오면 예수님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가계도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탄생설화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성경에 예언된 사건이라고 해석이 시작됩니다. 누가복음서로 오면 예수님의 족보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거룩한 가계도가 완성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의 수태고지가 있었고 세례 요한의 탄생설화도 추가 됩니다. 탄생하시는 날에도 천사의 방문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으로 오면 탄생설화를 이야기하는 수준을 넘어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하나님으로 그 정체성이 격상됩니다. 이제는 사람으로서 탄생의 설화를 기록하는 일이 신성을 모독하는 차원으로 예수는 유일한 그리스도 하나님의 한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유일한 존재로 사람으로서 족보를 이야기하는 일이 필요 없는 차원으로 격상됩니다.

마가복음에서 마태와 누가 그리고 요한복음서의 순서로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어 갑니다. 요한복음서로 오면 더 이상 확대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이 없는 수준으로 올라갑니다. 이런 과정이 복음서가 기록된 때와 같이 확대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신화화 작업이 진행되는 순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인의 탄생설화 중에서 제일 신화화된 탄생설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인의 탄생설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극대화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위대한 성공을 이룬 사람은 대부분 어린 시절과 탄생이 미화되고 가공됩니다. 한국역사에서도 이런 신화화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신라를 개국했다고 하는 박혁서세의 알에서 태어났다는 설화, 강감찬 장군의 탄생, 율곡이나 퇴계의 태몽 등이 보통 사람과는 다르게 탄생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미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보통 사람으로 죽었다면 탄생의 이야기가 전해질 리가 없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생가가 보전되고 사람들의 방문이 많아 관광지로 격상되는 때가 있습니다. 문재인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흥남철수작전에서 거제도로 피난 온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이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생각된다. 미국에 가서 내가 미국의 도움 때문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말에 미국사람이 감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장애인 친구들과 등교를 같이 하는 미담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만일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고 통일에 대한 확실한 초석을 놓은 대통령이 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그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와는 달랐다는 증거로 격상될 것입니다. 그가 선거에 개입하고 인사와 경제정책의 오류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면 이런 이야기들은 언급한 가치조차도 상실되는 가십이 될 것입니다. 결과가 시작을 미화시키는 작업이 역사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설화도 그가 그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달았고 그리스도로서 권능이 기적으로 드러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신화화된 작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당신의 탄생에 대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후세에 그를 하나님으로 격상시킨 사람들이 만든 설화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확대되어 이제는 그를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일이 그를 모욕한 것처럼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한 신화화 작업이 그에게만 머물 수 없는 차원으로 의식이 진보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으로 지목된 요한의 출생도 거룩한 탄생이어야 합니다. 마리아에게 수태고지를 할 가브리엘 천사가 요한의 아버지에게 먼저 나타나 요한의 수태를 예고합니다.

 

수태고지나 본문에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유대의 한 산골에 있는 사가랴의 집에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역사적인 사실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아이를 밴 두 여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일도 책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전에서 제사장의 일을 하는 제사장의 집이 유대의 한 산골에 있다는 기록도 역사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이런 신화화 작업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작업을 해야할 정도의 차원에 도달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에게 어떤 감동이 있었기에 이런 기록을 할 수밖에 없었는가? 저자의 같은 감동을 받고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문제 중에 하나는 성경의 기록을 전부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주장하므로 영적인 차원을 잊어버리는 일입니다. 역사적인 사실보다 영적인 차원이 더 중요하고 우선적이 되어야 함을 놓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육신이 부할함이 진리라고 주장함으로 영적인 깨어남에서 멀어지는 일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저자의 의도와 감동이 우선이고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사가랴의 집을 방문하여 엘리사벳에게 문안합니다. 문안하는 소리를 들을 때 엘리사벳의 배 안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느낍니다. 그 때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감동이 그녀에게 몰려옵니다.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을 받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동의 경험은 경험한 사람의 의식을 영적인 차원으로 옮아가게 합니다. 그 경험이 그 사람에게만 머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의 경험은 받은 사람을 넘어 주위로 퍼져나가 됩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받은 사람 안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속에서 불이 타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동을 전하면 듣는 사람 안에서 성령의 움직임을 느끼게 합니다. 영의 깨움이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하는 말이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라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입니다. 엘리사벳 안에서 일어나는 깨달음과 감동이 이런 반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성격과 자기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누군인지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집니다. 안에서 아이가 기쁨으로 말미암아 뛰노는 현상이 주의 어머니의 방문으로 말미암고 있음에 깨어납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한 사람을 만나는 일로 말미암아 자기의 존재와 삶이 다른 차원으로 옮아가고 있음을 느낀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기쁨이 엘리사벳의 영혼을 가득히 채우고 있습니다.

 

믿음의 결론은 기쁨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즐거움과는 다릅니다. 산골에 동네에서 애기를 밴 두 여인의 만남이 안에서 올라오는 기쁨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의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존재가 주는 기쁨이 두 여인의 마음에 가득합니다. 즐거움은 나 안에서 끝나지만 기쁨은 퍼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현장입니다.

기쁨을 전하는 사람에게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감탄합니다. 마리아로부터 전해지는 믿음의 힘이 엘리사벳에게도 전달이 되어 이런 고백을 하게 합니다.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에게 같은 복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마음에서 믿어지면 그 믿는 사람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믿음이 나오는 사람 옆에서 믿음을 느끼는 사람도 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을 두고 세상의 복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방문으로 말미암아 엘리사벳 안에서 일어나는 감동과 기쁨을 본 마리아의 마음이 하나님의 찬양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의 성격을 더 분명하게 알게 되는 증거가 이렇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나가는 하나님의 은총이 이런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을 본 사람 안에 더 큰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마리아는 자기 마음의 기쁨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비천을 돌보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만세에 복이 있는 사람이 되었으므로 변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된 기쁨을 노래합니다.

에고에서 그리스도로, 중생에서 부처로, 시간 안에서 영원으로, 공간 안에서 무한으로, 형상에서 무형상으로 깨어났다는 고백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났고 태어날 사람으로서 자기를 부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더 가야할 곳이 없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없는 지금 여기의 충만함에 이르렀습니다.

 

누가복음서를 기록한 저자의 의도는 역사적인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화화하는 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신화로 만들어야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핵심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서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든지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더 큰 은혜가 있을 수 없습니다.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게 한 은총이 우리들에게도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추천

댓글 0

자유게시판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추천 조회
이전글 아버지의 사랑 운영자 2019.12.29 0 96
다음글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운영자 2019.12.15 0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