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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야 하는 생명의 떡 운영자 20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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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6장41절51절

먹어야 하는 생명의 떡

 

41. 자기가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

4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45.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리라

46.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오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역사 속에서 살다 십자가에서 처형됨으로 이 세상에서 삶을 마감한 예수님의 생애는 우리가 이웃을 어떤 눈으로 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교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를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를 본 사람에게 있었던 문제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착각이 투사됨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람은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내 마음에 있는 것을 투사하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가 잘 보여줍니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대사는 돼지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보고 왕은 부처님 같다고 합니다. 이성계가 나는 대사를 돼지 같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나를 부처와 같다고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무학대사의 대답이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모든 중생이 부처로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태어나서 환경에 의하여 결정되어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사랑이신 아버지일 수 없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고생할 것이 명백한 곳으로 보내기 위하여 창조하셨다면 사랑의 아버지일 수 없습니다. 또 사랑하지만 문제가 있는 곳에 문제를 해결하라고 보냈다면 전능하신 분일 수가 없게 됩니다.

내가 해결해야 하고 감당해야 하는 모든 문제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투사가 만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내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힘이 내 마음이 가진 힘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그대로 살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나로부터 빼앗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사람이 마음의 투사로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 갇혀 사는 사람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는 분입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로 깨어나 보니까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로 깨어나야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 안에서 계시는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 먹어야 하는 생명의 떡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깨어나야 마음의 투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음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면 생명의 떡을 먹은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이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수군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들이 아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고 마리아의 아들인 줄 아는데 어떻게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의 헤아림으로 사는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지금도 우리 옆에서 잘 아는 사람이 자기가 하늘로부터 온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면 정신이 이상해졌거나 아니면 이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처럼 우리도 이웃에 대해 그렇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나고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아 내 옆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으로 사는 역사의 예수에 대해 가졌던 문제가 지금 우리가 이웃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을 들으시고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처럼 그리스도로 깨어나게 하시는 일이 당신의 소명임을 알아듣고 이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와 예수님과의 차이점은 그는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사람이고 우리는 이 진리를 모르고 부인하면서 세상 사람인 에고로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당신이 전하시는 이 소식을 듣고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에게 수군거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선지자의 글에 그들이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리라 이는 아버지를 본 자가 있다는 것이 아니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리스도로 깨어나는 일은 마음의 헤아림으로 사는 세상사람인 에고에게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면 할수록 내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는 확신만 더 강해집니다. 예수님처럼 하늘의 조명이 있어야 내가 그리스도임에로 깨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두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로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아버지의 이끄심에 따라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물리적인 시간의 마지막이거나 혹은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을 뜻하지 않습니다. 에고로서 정체성이 끝나면 물리적인 시간은 끝나고 시간을 넘은 다른 차원의 삶이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에고로서의 정체성은 언제 어디서든 내 마음이 원하는 한 가지 소원이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고 하시고 또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 안으로 들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훈련을 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도덕경에서는 爲學日益이요 爲道日損이라고 합니다. 배움의 길은 매일 무엇을 더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사는 길은 열심히 노력하여 무엇이든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도의 길 즉 내가 누구인지 깨어나는 길을 매일 덜어내므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지면 다른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진리에로 깨어나는 역설이 일어납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에로 깨어나기를 원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그리스도로 깨어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두고 이사야서에서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사54:13)라고 하시는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로 깨어날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이대로 안되고 내 마음이나 세상이 배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마음의 결정이 내려질 때는 내가 정하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윤회의 고통 속에서 헤맬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로서 무한한 인내를 가지시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무한한 인내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지 못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구원을 두고 시간 속에서 방황하는 고생은 할 필요가 없고 언제나 끝을 낼 수 있습니다.

구원을 받음은 세상에 속한 내가 하나님을 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사실은 헛것을 본 것이고 자기 안에서 일어난 환상과 자기가 원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일 뿐입니다. 구원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하나님과 하나인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앎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두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로 깨어나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사람은 삶과 죽음의 상대세계로부터 벗어나 생명만 있는 차원으로 옮아갑니다. 예수님 안에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 내 안에도 계심이 사실로 받아들여지면 시간과 장소의 한계로부터 해방됩니다. 그것이 영생이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떡은 물리적인 차원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준 떡이라는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습니다. 만나는 영생을 선물로 주는 생명의 떡이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지 실재가 아닙니다.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상대세계를 넘어가는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떡은 사람 안에 참나인 그리스도로 계시는 무형상의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떡은 당신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지금 여기 내안에 계심에 깨어나면 죽음은 없다는 것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스스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는 그리스도만 계십니다. 우리 안에는 에고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당신의 살이라고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의 살인 그리스도를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떡을 알아보고 먹으면 생명의 세계로 깨어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인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없는 눈이 없어서 그를 십자가에서 처형하였습니다. 십자가의 교훈은 이웃이 누구로 보이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웃을 죽을 수밖에 없는 에고로 보느냐 아니면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로 생명의 떡으로 보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이 십자가입니다.

내 마음이 에고를 투사하느냐 아니면 그리스도를 확장하면서 사는가의 질문은 우리 마음에서 떠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깨어나 이웃 안에서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지 않으면 이 세상은 지옥이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그리스도로 깨어나면 지금 여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내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에게 예수님처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말할 수 있는 차원으로 깨어남이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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